서울 이야기

강홍빈, 대학천변 기행 1. 동숭동 한 세기 / 2026.01.09. @도시상담

cityscape 2026. 2. 2. 02:25

 

작년 2월, 도시상담 초대서가 특강(https://cityscape360.kr/16) 을 통해 처음 들었던 강홍빈 박사님의 강연은 내가 서울이라는 도시를 파고 든 시작점이자, 가장 궁금했던 분을 만나 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너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약 1년 뒤인 2026년 1월 9일에는, 도시상담의 오픈 1주년 기념으로 동숭동에 대한 특강이 열렸다. 공지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신청.

강홍빈 박사님이 대학천변 주변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쓰고 계신다는 걸 접한건 2023년 서울학 공동 심포지움 기조강연에서였다. 항상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이번 특강은 그 중 '동숭동'주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시간. 

 

시작하며.

홍보 이미지 속 제목은 대학천변 기행1. 동숭동 한 세기 였지만, ppt 제목은 <마로니에의 회상: 캠퍼스가 떠난 자리에서> 였다.
(시작 전 선생님께서 얼핏 하셨던 말씀이, 제목을 멋있게 좀 바꾸어 보셨다고.)


대학천변, 청운동, 백운동천, MIT시절 찰스 강변. 하천 4개와 관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 강연.

살아온 궤적과 하천을 연결 짓는 도입부터가 인상적이었다.

 

오늘은 대학천변 기행 4개 동중 첫 시작인 동숭동이다.

중간중간 설명하겠지만, 강홍빈 선생님의 슬라이드엔 글이 거의 없고 사진과 자료이미지 중심이다. 슬라이드당 이미지 한장 내지 두장으로 한시간 반이 넘는 시간을 꽉 채워주시는, 스토리텔러로서 내공이 엄청난 분이시다. 이미지를 설명해주실 때마다 보이는 호기심 가득한 선생님의 미소가 참 인상적이었다. 후기를 쓰는 지금도, 그 미소가 또렷이 생각난다. 내가 스스로에게 바라는 딱 하나가 있다면, 호기심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인데, 선생님을 보면서 거듭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더욱 호기심을 지키고 살자고.

 

다시 강연으로 돌아와서, 서울대 문리대 교정 자리에 있는 마로니에 나무와 성균관에 있는 500년의 은행나무 사진에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경성제대 설립때부터의 터줏대감인 마로니에와,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 나무가 대학의 상징이지 않았을까-하는 도입으로 (인트로부터 정말 감탄했다.)

 

 

강연 목차

 

 

전사(前史)부터 보기 시작했다. 수선전도에서 현 동숭동자리를 짚고, 배추밭, 흥덕동천, 경모궁이 있던 모습을 설명해주셨다. 문안이지만 변두리같았던 곳.

통감부시절, 서양식 병원인 대한의원이 들어섰고, 이화동 쪽으로 공업전습소라는 현대적 교육기관있던 상황.

이상재를 필두로한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이에 대한 일제의 대응, 제국대학설치. 조그마한 부락과 농지가 있던 당시 땅의 상황.

그리고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계획도 자료.

 

30년대 대학천이 정비되고 캠퍼스가 갖춰지는 과정, 엄청난 제국주의적 권위.

대경성부대관이라는 지도(1936년 제작, 역사박물관자료링크) 속 학교가 들어서고 대학천이 있는 모습.

당시 제국대학 학생들은 조선인이 소수인 상황.

"경성대학"

해방. 아주 짧은 기간 경성제대가 아닌 경성대학 시절의 사진. 미군청이 46년 설립, 공포.

미군이 보기엔 대학이 너무 많았던 상황, 통합하는 정책. 당시 학교는 이념과 이해관계의 갈등, 신탁에 대한 찬탁, 반탁까지 얽히고 설킨 혼란의 시기.

 

이 설명 사이에 소개해주신 강홍빈 선생님의 숙부님-경성제대 예과-본과 중 징집되었다가, 돌아와보니 학교가 혼란의 시기였고, 이후 불교학자가 되신 이야기를 해주셨다. 역사 이야기 속 개인의 삶을 이야기해주시는 부분이 몰입감이 좋았다.

 

마로니에, 미라보 다리, 학림다방

 

60년대 학교는 어느정도 복구되고, 개울따라 개나리, 라일락이 있던 풍경, 문리대의 아우라가 있었다고 한다.

대학천 개울이 냄새나는 하천이지만, 센 강이라 부르고, 다리는 미라보 다리라고 불렀던 이야기도.

1971 당시 서울대 배치도. 연건, 동숭, 청량리, 종암, 공릉, 을지로, 수원에 흩어져 있는 캠퍼스가 그려져 있다.

 

당시 학교의 고민은 흩어져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캠퍼스가 대학로에도 있고(문리대, 법대, 의대 등) 공릉에도 있고(현 서울과기대 부지), 농대는 저기(수원) 있고 등등. 통합을 위한 여러 계획들이 만들어졌었다고. '쌍권총 총장'으로 불렸던 유기천 실세 총장이 동숭동을 중심으로 캠퍼스를 종합화하는 안을 내놓았다.

통합 계획안

 

이 안은 동대문-삼선교를 잇는 우회도로, 낙산 아래를 뚫고, 대학로를 확장하고, 초등학교를 이전하는 등등이 포함된, 전혀 허황된 계획이 아니었으며, 대통령 보고도 마친것으로 보이는 안이라고 설명하셨다.

하지만 유기천 총장이 권고사직된 후, 새 총장에게 기존계획을 백지화하고, 국가사업을 빠르게 추진할 관악캠퍼스 계획이 세워졌다고 한다. 아주 일사분란하게.

그런데 대통령이 애초에 원한건 태릉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 모두 크게 반대했던 것 같다고. 계획이 왔다갔다 하다가, 골프장이 있던 관악으로 최종 결정되었고, 결정하자마자 기공식부터 했다고.

6개월뒤 캠퍼스 마스터플랜이 세워졌는데, 그 날이 바로 문리대에 군부대가 들어가고 위수령이 발동한 바로 그날이었다고 한다.

 

구 서울대 부지와 대한주택공사...

캠퍼스 이전을 결정했지만,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 부지는 잘 안팔렸다고 한다. 각종 강북 억제책으로 인해 개발 제약이 많았으니 말이다. 마지막엔 결국 주공(대한주택공사)을 동원해서, 주공이 땅 사서 아파트 짓고 돈 서울대 주라고(..)  그때부터 아파트 건설 계획이 세워졌고, 처음 대학로 아파트 계획에 대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주공이 열심히 그렸던 그림...

주공 입장에서는 맡은바 열심히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2,000여 세대의 고급주거, 도서관은 쇼핑센터로 만들고, 대학본부 건물은 관리사무소로 쓰고 등등. 사회적 반응이 좋았을리가 없었고, 그렇게 진퇴양난의 상황에 있던 주공에 새로운 사장이 온다.  (아마 74년 서울시장에서 물러났던 양택식이, 주공사장으로 온 그 시기인 것 같다.)

주공은 부지를 잘게 찢어서 원가분양했지만 잘 안팔렸다고. 현재 마로니에 공원 땅만 남기고 열심히 팔아서, 80년대 후반에 가야 구 서울대 부지가 다 팔렸다고 한다.

참고로 아래 기사들은, 이 이야기가 흥미로워 조금 더 찾아본 것들 (아래 더보기)

더보기
서울大(대) 文理大(문리대)·師大(사대) 건물 垈地(대지) 住公(주공)서 43億(억)원에 買入(매입) / 1973.08.30. 동아일보
서울大(대)자리에 80坪(평)아파트 / 1973.09.04. 매일경제
80坪(평)‥‥超豪華(초호화) 15층아파트 / 1973.09.04. 조선일보
住宅公社(주택공사) 서울文理大(문리대) 師大(사대)자리에 30.40坪(평) 高價(고가)아파트 / 1975.03.12. 매일경제

 

 

그다음 유신의 유산.

66년까지는 동숭동을 중심으로 모아보자는 것에 대해 대통령이 막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66-67년 확 바뀌는데, 유신과 대선을 염두한 것 같다고. 하셨다. 뚜렷한 목표는 법대와 문리대를 거기서 빼내는 것. 떠난 자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생각이 없었던, 오직 대학을 빼낸다는 의미 말고는 계획이 없었던, "파묘"의 정서겠다고.

(여기서 파묘 포스터가 ppt에 등장했다.)

드러내는 것 자체가 중요했던 일이라고.

 

캠퍼스가 떠난 이후 이야기의 시작.

서울대 캠퍼스가 떠나고, 서울시는 대학천을 포장했다. 주공은 마로니에 주변의 빈 땅을 남겨두었고, 문예진흥원이 들어온다. 이 문예진흥원은 유신정권의 문화통제 기관.

일설에 의하면, 건축가 김수근이 마로니에 땅을 샀었다가, 설계하면서 무상기증했다고 한다.

 

- 소극장 운동 흐름

소극장이야 말로 연극인들을 키우는 곳인데,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

시작부터 국풍으로 시작했던 5공은 81년 공연업을 200석 이하는 허가가 아닌 신고제로 바꾸었는데, 이 작은 제도적 틈이 소극장의 황금기를 불러왔고, 소극장의 공급, 수요가 늘면서 소극장이 젊은이들의 언어, 문화의 중심이 된 시기를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87년 민주항쟁과 6.29 선언 이후, 소극장은 새로운 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대학로의 전성기.

4호선 개통으로 접근성이 높아지고, 차없는 거리를 시행하면서 대학로가 채워지고, 소극장이 모이고, 메카가 된 시기.

문화적으로 전성기이자 또 건축적으로는 건축 전시장이었던, 조건영, 김석철, 김원 등 건축가의 작품들이 곳곳에 자리한 시기.

여러 사람과 여러세대, 여러 계층이 섞여있던 대학로의 전성기.

 

하지만 대학로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거기엔 젠트리피케이션과 양극화가 불러온 변화가 있었다.

IMF 이후 월드컵을 준비하고, 인사동과 가회동을 보존하던 시기에 시청에 계셨던 강홍빈 선생님은 문화지구라는 제도를 인사동에 도입했는데, 대학로도 도입을 생각했지만 하지 못하고 시청을 나오셨다고 한다.

2001년 서울시의 서울시 문화지구 지정 및 운영방안 연구 중, 대학로 문화지구 관리계획.

 

대학로엔 점점 극장이 줄어드는 반면 상업시설은 늘고, 연극의 질은 나빠졌다고.

2004년 대학로를 문화지구로 지정했는데, 의도는 좋았던 정책이지만 공연장이 늘어난 것에 비해 실질적으로 대학로가 더 좋아지진 못했다고 한다. 중규모 이상의 극장들이 점점 더 대자본을 등에업고 늘어나고, 소극장들은 점점 밀려나고, 사라지고.. 마로니에 공원 재정비 안을 건축가 이종호가 내기도 했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지 못하고 더 심화되었고, 소극장은 점점 더 밀려나고, 대학로가 다른 성격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이어졌다.

박물간으로 간 지하철 1호선 연극.

 

이젠 낯설어진 대학로.

경모궁지에서 본 축의 사진을 보여주시면서, 경성제대를 만들면서 하고 싶었던 축이 아니었을까.

 


도시계획이 기껏해야 책장을 만드는 일 같다.

책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길 사이에 채워지는 것,

무대 앞에서 채워지는 드라마가 더 중요한게 아닌가 하는 마무리.


 

다시 마로니에로 돌아와서,

그리고 읽어주신 것

-

장소는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동숭동-대학로라는 무대와

거기서 한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드라마는

누가 계획한 것도

시나리오를 만든 것도 아니지만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것

 

그냥 지켜볼 뿐이다.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이.

 

-

 

관악캠퍼스에 대해서는-

대학이 도시속에서 봐야지,

사회 속에서 관찰해야지,

돌(岳)이 아니라.

 

대학은 도시속에서 도시와 같이 숨쉬어야 한다.

문리대를 분리한 것은,

문리대를 파묘한 것은,

대학만 뽑아낸 것이 아니라고.

캠퍼스가 나가는건, 대학캠퍼스만이 아니라

한 나라의 지성, 활력, 흡인력이 같이 뽑혀 나간 것이라고,

대학 이전에 따른 지역쇠퇴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

 

-

덧붙여 질문 답변 시간에는,

오늘날 마로니에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으로 김수근을 다시금 꼽으셨다.

주공을 설득해서 마로니에 나무를 살리고, 공원으로 두고,

문예진흥원이 자리잡게 하고 한, 그 장본인은 김수근이라고 생각하신다고.

 

 


서두에 언급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자료에 호기심을 반짝이며,

삶의 이야기와 도시, 건축, 사회, 문화를 아우르며 얘기해주시는 강홍빈 선생님의 스토리텔링이 정말로 마음에 많이 남았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알게된 서울의 이야기, 내가 더 찾아볼 실마리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큰 배움의 시간이었다.

 

특강은 계속 이어서 하신다고 하니,

한 강도 놓치지 말고 듣고 새기고 공부해야지. 소중한 시간 만들어주신 강홍빈 선생님과 도시상담의 박소현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관련링크

흥덕동천(대학천)에 대한 조사연구 자료로, 청계천박물관(서울역사박물관의 분관) 청계천지천연구

앞서 언급했지만 1936년 서울을 생생히 볼 수 있는 대경성부대관 (서울역사박물관 발행 지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