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면서, 오늘 이 자리는 최대한 빠르게, 기록으로 남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시간. 강홍빈 선생님의 <책장의 고고학>. 이 특강은 도시건축분야 전문서점, @dosisangdam의 시그니처 프로그램 <초대서가>의 일환이었다. 선생님의 서가 일부가 서점의 한 코너에 3개월간 꾸려진다.
무슨얘기부터 적을까, 일단 강홍빈 선생님의 이름을 알게된 대략 12년 전쯤의 얘기부터 하면 좋겠다.
(개인적인 얘기가 다소 길게 있으니, 강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표 자리부터 보시면 됩니다.)
"서울학"이라는 단어는 학교의 역사 교양 수업에서 처음 접했다. 학부 과정 중엔 역사/철학 분야의 교양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마침 시간표에서 적당했던 과목이 서울학을 연구하시는 선생님들이 개설한 과목이었다. 그 수업에서 익숙하게 걸어다녔던 서울의 길에 담긴 이야기와 역사를 배우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학점을 채우려고, 졸업요건을 채운다고 들었던- 제한된 규정과 요건이- 전공은 대충 학교에 점찍으며 들으러 다니던 나에게, 탐구하고 싶은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간하는 '생활문화자료조사' 시리즈를 접한 것도 이때 즈음 이었다. 비매품이던 돈의문뉴타운지역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이대 앞 헌책방에서 사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던 길, 푹 빠져서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시절 살았지만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이 동네를 누군가 이렇게 멋진 책으로 남겨주어 감사하다는 마음, 서울에 대한 이런 책을 더 찾아보고 싶다는 마음. 그때 나와있던 아현뉴타운, 북아현뉴타운, 서촌 등등의 조사보고서를 열심히 찾아 읽었다. 도서관에서만 보기 아쉬워 온오프라인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하나 둘 구했고, 내 책장에 조사보고서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든든든하고 행복했다.
생활문화자료조사 시리즈를 접하면서 역사박물관에 정말 자주 다녔다. 서울역사자료실에서 박물관에서 만든 책들, 다른 도서관에서는 보기 어려운 서울학 책들을 발견하고 내가 좋아하는 이 도시를 알아가는 기쁨에 전공공부는 접고 혼자 열심히 서울 답사를 다니기도 했다. 이 책 저 책을 오가며 읽고, 여기저기 답사를 다니던 시기가 여태까지 중 가장 인풋이 많았던 시기였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되게 나이브하고 철이 없기도 했는데-내 시선에 대한 고민을 거의 없었기 때문에-멋도 모르고 다녔던 그 시기가 있어서 뭐라도 쌓을 토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일지도.
아무튼.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시리즈에 이어서, 시대별 서울사진을 수록한 서울시정사진총서, (주로)해외에 소장되어 있던 서울에 대한 자료를 소개하는 학술총서 시리즈들을 접하고 내 책장에 하나 둘 모으면서 역박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그러다 언젠가 이 좋은 자료를 만든 기관의 관장님은 어떤 분이신가-하고 찾아보고 상당히 놀랐다. 도시계획, 행정, 연구, 박물관까지 이어지는, 서울에 대해 찾아볼수록 궁금한 분이었다. 도시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동료와 언젠가 그런 얘기도 했었다. 언젠가 우리가 크면(?) 선생님 인터뷰를 꼭 해보고 싶다고.
선생님이 직접 하시는 얘기가 궁금해서 2000년대 초 내셨던 <서울 에세이>를 찾아 읽기도 했고 (이번 특강 인터미션때 사인을 받았다!❤️) 2023년 10월 서울학 심포지엄때 기조강연 글도 여러 번 읽었었다. 그리고 도시상담의 이 특강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내 마음은 정말... 이건 진짜 귀한 기회다! 곧바로 신청하고 특강날을 기다렸다.
기대보다 훨씬 더 밀도 있고 즐거웠던 특강이었다. 예정보다 길어져 3시간이 넘어갔지만 지루할 틈도 없이 모두가 눈을 반짝거리던 시간이었다. 플로어에도 엄청난 분들이 오셨다.
★
아무튼, 이제 본격적으로 강연 내용 얘기를 해보면.
초대 서가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강연에서 소개해주신 책들이 모두 책장에 꽂혀있다. 특강을 준비하시면서 직접 책을 고르고, 사진을 찍으시고, 책장에 꽂는 작업도 손수 하셨다고 한다.
슬라이드는 이렇게 선생님의 시기 구분이 나오고, 그 때의 화두였던, 공부했던, 만들었던 책들의 사진이 이어지는 구성이다.
대부분 책 사진이지만 가끔 도시나 사회의 풍경(당시 업무와 연관된)이나 선생님의 사진들도 나온다.
유학시절 보셨던 책들 얘기도 재밌었지만, 특히 한국으로 돌아오신 후의 일과 책 얘기들부터는, 자료를 통해 조각 조각 알던 이야기들이 연결되는 느낌이라 더 재밌고 흥미로웠다. 여기서부터는 책 사진들과 해주셨던 이야기들을 최대한 소개해보려고 한다.
밀라노 트리엔날레 서울관. 대한주택공사 연구소장 재직 시절, 이 일을 주공으로 가지고 오셨다고 한다. 원래 주공이 할 일이 아닌 것이어서 사장이 싫어했다는… 하지만 이 전시를 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했기에 추진했다고 하시며, 이 전시에 그래픽 안상수 외, 조각, 영상, 그림 등에서 아티스트들이 다수 참여했다고 한다.
(*트리엔날레 서울관에 참여했던 작가 중 성완경에 대한 논문("미술의 사회화"- 1980~1990년대 성완경의 벽화 프로젝트 -조윤지, 2023)에서 관련얘기를 조금 더 찾아볼 수 있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약칭 시정연, 현 서울연구원) 개원 때 사진. 시정연을 만든 건 도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터전을 만드는 것이었기에 중요한 순간으로 꼽으셨다. 사실 시정연을 만들 때 중앙정부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교통연구원 있고, 국토연구원 있는데 왜? 이런식. 힘들었지만 만든 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신다고.
1994년 서울 정도 600년 사업은, 그냥 잔치하고 끝내려던 걸 자원해서 한 사업이라고 하셨다. 올림픽을 하면서 봤던 수많은 자료들을 계기로 해서, 서울의 역사를 쭉 돌아보는 사업으로 만들었다고. 이때 했던 전시가 아마도 밀라노 트리엔날레말고 처음 했던 서울에 대한 전시였을 것이라 한다. 600년사업과 올림픽에 대한 언급에서, 나도 공감했다. 88서울올림픽은, 자료를 보면 볼수록 단순한 메가스포츠이벤트가 아니었다. 2020년 <올림픽이펙트>전시에 참여하면서 여러 올림픽 자료들을 집중해서 보게 되었는데 새삼 놀랐다. 이 올림픽 유치가 한 나라에, 도시에, 특히 서울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또 이때 생산된 자료 또한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서울600년 사업을 통해 1994년 생산된 수많은 자료들을 보면서 중요한 시기를 느꼈던 것이 - 사실 선생님의 기획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된 것도 좋았다.
다음은 조순시정 서울시를 나와 서울시립대로 간 이야기로 이어졌다. 다큐에 나오셨던 장면도 살짝 나오고, 사회학, 공간환경, 이런 분야의 공부를 열심히 하시던 시기라고 소개하셨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이 서로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가 화두였다고 한다.
서울 20세기-시리즈. 2000년을 앞두고, 그간의 자료를 한 번 집대성하고 새로운 시대로 가야하지 않느냐라는 생각에 김광중 교수의 주도로 만들었던 시리즈라고 소개하셨다. 만들었던 두 기관-서울시정개발연구원과 서울학연구소-에서 나와서 더 뿌듯했다는 얘기를 덧붙이시며. 자주 참고하는 책이 나와서 나도 반가웠다.
1999년 서울시 부시장으로 갔던 시기에는 인사동, 북촌, 삼청각을 남기고 살린 이야기, 또 난지도 공원화 추진의 뿌듯함과 중요성을 얘기하셨고,
선유도 공원의 경우, 정수장 폐쇄 소식을 듣고 공원으로 만드는 결정에 기여하셨다고 한다. 좋아하는 공간의 히스토리를 들을 때는 더 즐겁다.
2000년대 초-중반, 본격적으로 서울에 관해 나오기 시작하는 책들.
Cities in civilization. 도시사에서 혁신의 현장이었던 도시를 추적한 책. 과학사를 보면서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냐를 보았던 것처럼, 역사를 통해 혁신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게된 책으로 소개하신 책이다.
2002년부터 가슴 속 응어리로 남아있는 두 개로 청계천과 세운상가 주변 사진을 보여주시며 얘기하셨다. 도시의 소공인들이 모여있는, 생산기지 역할을 하는 지역들의 가치. 이 지역에서 일자리가 생기고 또 큰 공장들이 돌아갈 수 있는 것. 그래서 가급적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청계천을 복원하기 위해 주변의 소공인들을 다 장지(가든파이브)로 보내버리는 것이 맞느냐, 그걸 다 밀고 국제금융가로 만드는 게 능사냐, 하지만 그런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냐, 갈등과 고민이 컸다는 얘기들.
소비가 되는 도시가 된다는 것, 젠트리피케이션 등. 전례없던 현상에 대한 고민, 그래서 이어지는 키워드 "포스트모던 어바니즘"
도시에 대한 수 많은 책을 읽었지만,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만큼 마음에 와닿은, 마음을 움직인 책은 없었다고 한다.
사회지리학자인 하비가 파리에 대해 쓴 책과 문학가인 파묵이 이스탄불에 대해 쓴 걸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하비의 길도 있고 파묵의 길도 있구나, 그렇지만 선생님은 파묵이 더 맞는다고 :)
그리고 역사박물관으로 가신 이야기가 나왔다.
때는 서울시립대 90주년, 동대문에서 청량리로 이어지는 전찻길을 보면 재밌겠다, 사람들이 도심만 보는데 주변부, 외곽을 보면 좋겠다 싶어서 역사박물관에 제안했는데 (이런거 하는 박물관 아니라며) 안받았다고. '내가 박물관의 엄마인데', 이런 거 하는 박물관으로 만든 것인데 당황스러웠고 그래서 관장에 지원하게 되셨다고….
다들 당황했지만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시켜만 달라고, 그렇게 해서 갔던 서울역사박물관에서의 7년은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기라고 했다.
선생님이 그때 정리한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 역사의" 박물관이다.
서울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장소를 중심으로 본다. 장소에서 시작해 사람, 경제 등등을 본다. 장소가 출발점이자, 마지막이다. 라고.
이때부터는 독서가가 아니라 책 제작자의 시기로 설명하셨다.
박물관의 전시도 사실 책이랑 같다고, 책은 글자를 통해서 보지만 전시는 물건 등을 통해 메시지를 읽는 것이라는 설명.
그냥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빚을 진 땅과 장소-청계천, 고가도로, …-들을 전시로 풀었다고 소개하신 전시들.
<아파트 인생>과 <안녕! 고가도로>는 2014년과 이후의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전시라 더 눈길이 갔다.
역박의 시그니처 생활문화자료조사와, 공간에 기반한 서울 역사를 다룬 전시들을 소개해주셨다.
(사진은 찍지 못했다) 해외 서울학 자료들을 찾아 소개한 책들도 보여주셨다. 베네딕트 수도원 소장 서울사진이라던지, 모리스꾸랑 서울의 추억이라던지. 특히 모리스꾸랑 자료를 소개하면서 너무나도 뿌듯해하셨다. 직접 프랑스로 찾아가 교섭하고, 복간해서 작업한 것이라고. 나도 개인적으로 학술총서중에 제일 힘들게 구했고, 너무 좋아하는 책이라 어떻게 그 자료를 알게 되었고, 책으로 냈는지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기뻤다.
(아래 트윗에 "서울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모리스 꾸랑의 글을 일부 올렸다. 궁금하시다면 읽어보시길..)
https://x.com/cityscape_360/status/1176113038698528769
마무리 즈음 보여주셨던 책들.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의 저자 권태준 선생님은 HURPI에서 맨 처음 만난 분들 중 한 분으로, 환경계획연구소를 같이 만든 분이라고 한다. 이 분을 통해서 분배의 정의를 처음 들었다고.
2016년 은퇴후에는, 종이책보다는 주로 킨들을 통해 역사소설을 열심히 보고 있다는 이야기.
놓친 부분도 있고, 소개하지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메모했던 내용은 최대한 기록해보았다.
이 포스팅의 마무리를 어떻게 지을까,
끝난 직후 후다닥 메모했던 내용을 적어보겠다.
한 개인의 경험, 역사, 관계, 사회
이것들이 얽히고 연결된 지식의 네트워크는
결코 AI가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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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짤막 다른 글과 연구를 통해서 알고 있던 걸 한 개인의 삶의 여정 속에서, 그 당시 중요했던 책과 배움, 생산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들으니까 얼마나, 얼마나 좋던지, 너무나 귀한 3시간이었다. 강홍빈 선생님과 자리를 마련해주신 도시상담 운영자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서울의 서지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어떻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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