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강홍빈, 연지동 130년 - '선교사 언덕'에서 혼종의 도심공간으로 / 2026.05.15. @도시상담
2026년 책방 도시상담에서 진행되는 강홍빈 선생님의 동네 특강은 총 4강으로 진행된다.
1월 동숭동, 3월 충신, 효제동에 이어서 5월은 연지동. 앞서 두 동네와는 다른 도시 질서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이번 특강도 내러티브와 진행이 꽤 달랐다.

연지동은 옆 동네들보다 고층이고, 필지도 크다. 기독교 관련 건물, 오래된 벽돌 건물, 고층의 기업 본사들이 같이 있는 건, 바로 옆의 동네들과는 다른 기원과 사회, 제도, 조직의 변화를 경유해서 동네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강연에서 연지동의 130년은 총 6부로 구분되는데, 이 구분을 읽는 것이 이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1. 선교사 언덕의 탄생 (1884-1910)
먼저, 지명의 역사로 보면 연동교회에 붙어 있는 연동=연지동이고, 연지는 연못골에서 온 것이다. 동네 형성사를 살피면, 19세기 후반까지, 연지동엔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동네가 언덕을 끼고 있는데, 아마 이 언덕은 종묘가 보이는 언덕이었을 것이고, 이 때문에 왕권이 강했을 땐 민가를 짓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리고 이번 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교에 대한 맥락이 필요했기에, 앞부분에서 선교에 대한 맥락을 먼저 설명해주셨다.
선교사들은 정동을 중심으로 양인촌이 형성되었고, 초기 선교사들이 만든 학교(정동여학교 등)엔 고아나 가난한 집 아이들이 주로 입학했다고 한다. 서양식 학교를 보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러다 1890년대 후반부터 선교지기지를 약간 외곽으로 옮기게 되는데, 먼저 진출한게 감리교였다. 동대문에 볼드윈 진료소가 생긴게 1892년이었고, 이 진료소가 2008년까지 있었던 이대동대문병원의 전신이다.
(관련 자료는 이화의료원의 역사를 소개한 웹페이지를 참고. https://part.eumc.ac.kr/dept/pogoonyogoan/bbs/bbsView.do?menuId=003020&cid=2529)
그리고 연지동에 1895년 연동여학교가 들어섰다. 정동 제중원 사택에 있던 정동여학당이 옮긴 것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덕수궁으로 옮기면서 대한제국은 정동 대사관 땅을 매입하려고 한다. 장로교와의 거래를 성공해서, 궁내부가 가진 2만평 정도 땅을 장로교가 갖게 되고, 1904년 선교사 사택이 건축된다.


1904년 외국인 단지가 만들어진데 더해 한성감옥에 있던 조선의 엘리트들이 연지동에 오게 된다. 독립협회 요인들이 개종을 하는데,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데에 기독교가 핵심 키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제임스 게일(https://yanghwajin.net/story/info.php?mode=view&cat_no=1&idx=16) 에게 세례를 받았다.
헤이그에 특사로 갔던 이준 열사는 연동교회의 신도였고, 이상재는 독립협회의 리더이자 고종의 어드바이저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뒤에서 진두지휘했던 인물이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던 해, 연동교회 예배당의 신축이 이뤄진다. 당시 "장안 제일의 부자교회"로 유명했다고.
2. 근대와 민족의식의 요람 연지동 (1910-1945)
연지동은 한반도 서북지역(황해도, 평안도)와의 연결이 강하다. 서북지역은 유교가 자리잡지 못했던 곳으로, 기독교를 빠르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기독교적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서북지역은 미국 북장로회 중심이었고, 이들 선교사들이 자리잡은 지역이 연지동 일대이기 때문.


선교사들의 학교를 중심으로 근대화, 민족의식이 싹텄고, 일제가 이를 내버려둘리 없었다.
1915년, 일제는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하면서 종교 교육과 의식을 금지한다.

여러 저항의 중심에 정신학교와 경신학교가 있었다.

정신여학교는 신여성의 산실이었고, 정신여학교의 바자회는 지역 명물이었다고 한다. 슬라이드에 있는 조선요리제법의 저자 방신영은 정신여학교 졸업자이자, 교사로도 재직한바 있다.
(참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730)
여기서부터 다소 혼란스럽고 복잡한 기독교사(史) 이야기. 집중이 필요하다.

슬라이드 위의 사진은, 1934.6-7월에 "한국선교 50주년".
아래 사진은 1934.10. "연동교회 40주년"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두 사진의 미묘한 차이를 읽어야 한다. 한국선교 50주년엔 아시아 전역의 장로교들이 모인 반면, 연동교회 사람들은 모이지 않았다. 두 사진에서 세브란스의 에비슨 말고는 겹치는 인물이 없이, 엇갈려서 행사가 진행된 것이다.
이 사진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1937년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정책 이후 기독교 미국 선교사들의 입장은 나뉘게 된다.
언더우드 계열은 학교를 살리는게 우선이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고 생각하고 하자.
평양의 원리주의적 장로교는 안한다는 입장.

일제의 탄압에, 경신학교 교장을 30년 했던 선교사 쿤스는 학교가 폐교되는 걸 볼 수 없었다.(그는 언더우드 계열의 입장이었다.)
학교 부감이었던 최태영과 논의해서 김홍량에게 이관한다. 학교 유지는 가능했지만, 연지동에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경신과 달리 정신여학교는 인수할 사람을 찾지 못했고, 선교사들이 자진 철수하면서 정신여학의 땅은 모두 일본 총독부의 땅이 되어버린다.
3. 기독교 정치의 심장 연지동 (1945-1960)
갑작스러운 해방을 맞이하며, 미군정이 가장 먼저 한 조치가 있다. 적산에 대해선 미군정 귀속으로 한다는 것. 미군정 요원들이 큰 집과 학교 등을 점거하고 사용한다.

적산에 대한 반환, 처리에 있어 키맨은 선교사들이었다. 연지동도 제일 먼저 반환되었고 (기타 기독교 관련 부지들도 그래서 먼저 반환된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기억해야할 것은,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이 공산을 피해 월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물 중 하나가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다. 영락교회는 일본 교회가 있던 명동 부지에 지어진 교회로, 이후 역사에서 계속 등장한다.

경신학교의 원 부지는 국유지가 되면서 잘개 쪼개진다. 그 와중에 경신학교는 이승만의 도움으로 혜화동에 자리를 잡게 된다. 현재의 경신중고등학교의 위치다.
장로교단의 분열:통합과 합동.
이 분열에는 여러 갈등이 있겠지만 WCC 참여를 둘러싼 분열이 있었다. 서북지역-경기,충청의 지역적 갈등도 있고, 이제부터 연지동 일대는 장로교 통합의 무대가 된다.

이승만의 건국 정부는 기독교 정부였다. 크리스마스 공휴일을 지정하고, 선거자료에도 나오는, 장로 이승만, 권사 이기붕.
4.19 혁명때, 연지동은 조용했다고 한다. 연동교회 상당수가 이승만을 지지했고, 이승만 정부에 이념적으로 동조한 사람들이 다수였기에. 4.19 희생자들에 대한 의식도 동대문운동장에서 불교식으로 치뤄진다. 연지동의 기독교는, 일제시대엔 강력한 독립운동 구심점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엔 심정적으로 동조했던 것이다.
4. 군사정권 속 연지동의 재구성(1961-1980)

5.16 군사정변에 대해, 기독교 인물들(사진속 정일권, 김활란, 최두선, 한경직)은 조건부 지지를 성명하며.. 미국을 방문한다.
한편으로 또 한일회담의 반대 중심엔 한경직이 있고.

김준곤이 주도한 대통령 조찬기조회의, 이 뒤에 있던 사람이 또 한경직이다…

1968년 WCC의 웁살라 선언

1970년 개관한 한국기독교회관 KNCC는 연지동의 민권운동, 민주주의 운동 요람이 되는 역할을 한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것과 비슷하게. 이 회관엔 범 기독교 세력에 + 세계교회가 연결되면서, 박정희 정권이 쉽게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해, 전태일 열사의 영결식이 연동교회에서 열린다.
원래 조영래 등은 영락교회에서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3선개헌과 유신에, 교계는 갈라진다.


부활절 연합예배와 여의도에 온 빌리그래함(w. 한경직)의 대비.
이제부터 여의도가 대비되는 씬으로 등장한다. 연지동을 읽으면서 같이 읽게 되는 여의도.


민주화운동 투옥자의 연락망이기도 했던 연지동의 목요기도회
여의도엔 엑스플로74, 민족복음화대회(김준곤).
관련 자료를 찾다보면, 보도하는 신문사의 계열도 다르다.

연지동 게일 목사의 사택지를 두고 연동교회와 삼양사가 매입 경쟁을 벌이지만, 결국 삼양사가 매입을 하게된다.
연지동에 있던 학교 자리가 이동하게 되는데, 정신여학교는 장실로, 은석초와 흥국고는 동대문밖으로 가게된다. 이제 선교지로서 성격은 많이 약해지는 장면이다.
5. 기념관과 회관의 시대 (1980-1993)
시대는 1980년으로 간다.

한경직, 김준곤이 중심이 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
다시 여의도를 보자.
여의도광장 국풍81,
여의도광장 100주년 선교대회, 1984년.

민주화 이후 진보적 교계는 통일쪽으로 나가고,

보수계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을 1989년 창설한다.
그리고 연지동에는 각기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회관들이 세워진다.



들어서는 회관들-여전도회관, 한국교회100주년 기념관.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이름만 봐서는… 쉬이 구분하기 어렵다. 기념하는 연도, 회관앞에 붙은 수식-단체의 이름을 보고 기원을 찾아야 조금 감을 잡을 수 있다.
6. 세계화시대의 연지동 (1993-)

마지막 부분이다. 일제강점기, 군사정권을 지나 세계화를 기치로 내건 문민정부에서 연지동.

IMF에 대해서도 교계의 입장과 해석은 다르다. 교회협과 한기총.
IMF 이후 연지동 빌딩들도 성격이 변한다. 기업들이 바뀌었으니.

은석빌딩은 삼성이 인수했다가 현대가 인수해서 사옥으로 쓰고 있고,
서울보증보험은 공룡같은 보증보험회사가 사옥을 지었다.
두산아트센터자리는 배오개시장 박승직 개인의 집이 있던 자리로, 연동교회 초기 멤버이기도 하다. 지금 두아센과 연동교회만 놓고는 떠올리기 어려운 관계.

기독교회관은 한동안 시민단체의 요람이었다가, 기독교 단체들도 흩어지면서 여러 용도로 렌트를 주며 사용되고 있고,
기독교연합회관은 웨딩홀 등 상업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거대한 회관이 예장통합총회창립 100주년을 맞아(선교100주년과 다르다) 기념관이 지어졌고.

연동교회에서 열린 2024.10월의 창립 130주년 기념예배와(슬라이드의 2023는 오기로 보인다)
2024.9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100주년 기념예배는 한국 현대사의 여러 사건들과 연관된, 다른 두 행사다.
마지막 아웃트로

연지동은, "역사를 비추는 창이자, 역사가 펼쳐진 무대이며, 그 결과가 축적된 장소다."
동네가 창이되어서 역사를 본다.
연지동만의 역사가 아니라,
근현대의 역사가 연지동에서 펼쳐진 것이다.
비어있는 땅에서 시작해서,
커져가는 도심의 일부와,
기독교의 속성들이.

+ 덧붙여서,

다양한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장이 쳐진 이 구역들을 쉽게 인지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

오래전부터 있던 연지동 은행나무는, 창업주 김연수의 유지로 삼양사 사옥을 리모델링하면서도 그대로 남았다.
이전 두 동네-동숭동, 충신/효제동과 다르게 연지동은 구한말 선교부터 현재의 종교계까지, 종교사(史)를 중심에 둔 사회/정치/도시의 변화사를 읽는 시간이었다. 어떤 렌즈를 갖추느냐에 따라, 내가 아는 만큼 해상도가 높아지는 것, 그것이 도시를 읽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마찬가지라는 것. 그래서 아마, 세 번의 강연 중 가장 어렵고 정리하기도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종교라는 렌즈도 그렇고, 도시를 읽는 방향이 반전된 것도 그렇고, 정리하면서 또 선생님의 다음 읽기가 기대된다.
중간중간 찾아보며 덧붙인 링크를 제외하고,
같이 읽어보면 좋은 자료들:
- 서울역사박물관, 연지.효제:새문화의 언덕 (원문 열람 가능)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12&endDt=&searchKey=TITLE___1002&sso=ok®Pwd=N&colExt8=&pageType=&sortOrder=&startDt=¤tPage=1&seq=20200610161900106
- 서울역사박물관, 100년 전 선교사의 서울살이 (원문 열람 불가)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12&endDt=&searchKey=TITLE___1002&sso=ok®Pwd=N&colExt8=&pageType=&sortOrder=&startDt=¤tPage=1&seq=20230126162214426&ctgCd=&showSummaryYn=N
- 서울역사박물관, 100년 전 선교사, 서울을 기록하다 (원문 열람 불가)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12&endDt=&searchKey=TITLE___1002&sso=ok®Pwd=N&colExt8=&pageType=&sortOrder=&startDt=¤tPage=1&seq=20211221163721517&ctgCd=&showSummaryY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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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좋지만, 논고가 선교사지역 형성을 이해하기에 매우 유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