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마라톤 대회와 관계인구 : 지역을 알기-관계 맺기 그 사이
달리기가 취미가 된 이후로, 내가 도시를 알아가고 이용하는 방법이 달라졌다. ‘달리기’는 ‘걷기’보다 같은 시간 동안 훨씬 더 긴 거리를 이동하며 살펴볼 수 있는 방식이다. 거기에, 달리는 속도감 속에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걸을 때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집 근처 뒷산의 산책로도, 한강의 물길도, 매일 출퇴근 길의 거리도, 그렇게 다니면 지겹지 않냐고들 했지만, 달릴 때 서울의 풍경이 지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익숙한 서울의 거리를 달리는 것도 재밌지만, 새로운 도시에서의 달리기는 한 차원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낯선 풍경 속에서 달리기는 속도가 느려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도시의 풍경만큼은 좋은 인상으로 마음 깊이 남았다. 도통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는 나이지만, "다른 도시에서의 달리기"에 매력을 발견한 뒤로, 어디를 여행하든 달리기 코스는 꼭 찾아보고 갔다. 그렇다고 계획한 코스를 꼭 달리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예정한 길이 아니더라도, 한참 돌아 헤매더라도, 그 우연함 속에 달리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달려본 도시는 그렇지 않은 도시보다 마음 깊이 남아, 도시와 나만의 관계를 맺어 나갔다.
2024년 4월 부산 여행은, 여행을 하는 김에 달리기가 아니라 달리러 가기 위한 여행이었다. 부산 광안대교 위를 달리는, '기브앤레이스'라는 마라톤 대회(주1)는 자동차만 다닐수 있는 도로를, 그것도 바다 위 대교를 달려볼 수 있는 대회였다. 실제로 대교 위를 달리면서 본 부산 도시 풍경은 단순히 해안도로를 따라 뛸 때보다 훨씬 아름답고 특별했다. 레이스가 끝난 후 같은 대회 기념티를 입고 곳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뛰고 오셨냐고 환대해주는 식당과 카페들에서의 만남도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이 대회를 계기로 부산은 나와 가장 강한 관계를 맺은 국내 도시가 되었다.
코로나19 유행이 끝나면서, 달리기 인기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달리기 유행은 마라톤 대회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서울에서 열리는 큰 대회뿐만 아니라 참여자가 적었던 지방도시의 대회들도 속속 조기 마감되기 시작했다.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매년 봄 열리는 '합천벚꽃마라톤'은 2025년 개최 결과, 관외 참가자 비율이 전년보다 57% 증가했다(주2) . 외부 방문객 유입이 절실한 소규모 지자체에게는 엄청난 수치였다.
하지만 지역 마라톤 대회의 뜨거운 열기와는 대조적으로, 지역의 소멸 위기는 심각하다. 합천군의 소멸위험지수 (주3)는 2023년 기준 0.144)로 전국 최하위권이다. 지역소멸의 위험은 비수도권 군 단위 지역뿐만 아니라, 광역 대도시와 그 위성도시 일부 지역에서도 그 위험이 가시권에 들어온 상황이다.
수도권 인구가 전국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 지금, 지방도시의 소멸위험은 점점 악화일로에 놓여있다. 낮은 출생률 속에서 인구 재생산은 그나마도 수도권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수도권 밖, 서울 밖을 경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인구구조가 낳는 심리적 단절과 무관심은 소멸의 재생산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규모를 막론하고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출생률에 인구의 '자연적 증가'는 기대하기 어렵고, '사회적 증가'도 소멸위험 지자체간 제로섬 게임이 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인구 개념 ‘관계인구’가 등장했다. 관계인구는 “특정 지역에 거주하지는 않지만 업무, 여가, 애착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지역의 활력에 기여하는 사람”(주5)들을 지칭한다.
관계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될까? 관계가 생기려면 일단 알아야 한다. 어떤 지역이 관계인구를 늘리고자 한다면, 그 지역을 '알게'하는 것이 시작이다. 지역마라톤은 그러한 '앎의 씨앗을 심기'에 유리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먼저 대회의 이름부터 그렇다. 지역의 많은 마라톤 대회들은 성주'참외'마라톤 (특산물), 예산'윤봉길'마라톤 (위인), 보령'머드임해'마라톤(관광자원)처럼, 대회 이름에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낸다.
사실 대회 이름은 시작일 뿐, 마라톤 대회를 통해서 주는 도시 경험이 앎-관계 만들기의 핵심이다.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짧게는 5, 10km부터 길게는 42.195km를 달리면서 도시를 경험을 하게 된다. 때문에 지역 마라톤 대회는 참여자 유입을 위해서 지역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코스 설계에 특히 심혈을 기울인다. '춘천마라톤'의 경우 단풍으로 물든 의암호 풍경을 따라가는 코스로 구성되어, "가을의 전설"이라고 불리고 있고, 철원군 DMZ 국제평화마라톤대회는 민통선 15km 코스를 경유하도록 코스를 설계했다. 이 외에도 많은 지자체들이 도심, 해안, 능선 등을 활용한다. 이렇게 대회를 통한 평소와는 다른 비일상적 공간 경험은 상당히 강렬하기 때문에, 대회 후 만들어갈 지역과의 관계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대회 전반에서 마주하는 지역주민들의 응원과 환대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지역 대회들은 특히 주민들의 자원봉사와 참여가 활발하다. 여기에 지역 대학, 지역 기업의 참여가 더해져 대회를 더 풍성하고 완성도 있게 만든다. 이들은 참여자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고, 일시적 공동체를 만들며 관계를 심화시킬 여지를 만든다. 기념품으로 주어지는 특색 있는 완주 메달과 지역 특산품은, 지역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실제 소비로 이어지는 관계의 원천이 된다. 최근 열리는 대회들은 지역의 상징물, 특산품을 메달에 형상화하여 지역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대회 기념품으로 특산물이나 지역상품권을 증정하여 특산물을 직접 먹어보고, 지역에서 소비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지역 마라톤이 주는 이 모든 장점과 효과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인 대회가 '관계인구'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물론 대회 자체는 단 몇 시간이면 끝나는 이벤트가 맞다. 하지만 다시 초반의 문제의식으로 돌아와서, 지금처럼 서울-수도권 밖을 잘 모르는 인구로 구성된 사회구조 아래, '무지',와 '무관심' 상태에서 관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마라톤은 지역을 알아가는 경험을 제공하고, 관계인구의 첫 단추를 제공하는, 지역 방문의 심리적 허들을 낮출 수 있는, 현 시대에 맞는 효과적인 '플랫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회 참가라는 뚜렷한 목적이 방문의 장벽을 낮추고, 대회에서 경험한 환대는 재방문을 이끄는 강력한 동인이 되기 때문이다. 춘천마라톤처럼 10회 이상 완주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는 대회의 경우, 강력한 재방문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최근에는 서울마라톤과 같은 메이저 대회가 참가 자격으로 공식 풀코스 기록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기록을 위해 특색 있는 지역 대회를 찾는 러너들이 생기면서 새로운 참여 유인책이 되고 있다. 지역 대회는 ‘러닝크루' 등 단체로 참가하는 경우가 많아 관계의 규모는 참가자 수 이상으로 커진다. 지자체들도 부스 제공 등으로 이를 적극 유도하고 있다.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관광객은 지역의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수동적 관람객과는 다르다는 점도 중요하다. 특정 명소-'점' 중심 관람자가 아니라, 대회 코스라는 '선'으로, 대회 코스와 직접 찾은 여러 동선이 결합된 '면'을 그리는 특성의 여행객이다. 도시를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고, 완주 서사를 남기고 또 가져간다. 세계적인 마라톤 대회(주6)들의 경우, 대회 개최로 몇천 억의 관광 수입7)을 올리며, 주민들은 완주 메달을 건 참가자들을 축하해주고 환대한다. 이는 대회를 통해 경제적 효과는 물론 그 도시와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망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까지 달리기가 취미, 개인의 성취를 넘어서 도시와 사람이 관계를 맺는 건강하고 유용한 방법임을 살펴보았다. "관계인구"라는 개념을 통해 지역 활성화를 모색하는 지자체들에게는 관계의 시작점 만들기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제 자리 잡는 달리기 문화 속에서 지역 마라톤 대회가 관계 인구를 만들고,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역 마라톤이 관계인구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단순한 제안에 그치지 않는다는 증거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는 트레일러닝 대회의 성공이, 행정안전부의 지원을 받는 '트레일빌리지' 조성 사업으로 이어졌다. 하나의 대회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그 관계가 깊어져 이제는 러너들을 위한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 지속가능한 관계 형성 통해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희망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주1) 엄밀한 의미의 ‘마라톤’ 대회의 거리는 42.195km이지만, 한국에서는 통상 짧은 거리(5km, 10km 등) 달리기 대회도 ‘마라톤 대회’라고 칭하는 경향이 있다.
주2) 출처: https://cm.asiae.co.kr/article/2025033109201750005
주3) 한 지역의 20-39 여성인구를 65세 이상 인구로 나눈 값. 0.5미만이면 인구소멸 위험지역으로 분류된다. 출처: 균형발전종합정보시스템(https://www.nabis.go.kr/contentsDetailView.do?menucd=258)
주4) 출처: 균형발전종합정보시스템, 시대별 변화 이미지는 (https://sojoong.joins.com/archives/50695)
주5) 출처: 균형발전종합정보시스템 https://nabis.go.kr/termsDetailView.do?menucd=189&gbnCode=S51&eventNo=367
주6)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의 꿈의 무대인 “세계6대마라톤” 도시-보스턴, 베를린, 도쿄, 시카고, 뉴욕, 런던이 대표적이다.
주7) 뉴욕마라톤이 창출하는 경제효과는 5900억, 마라톤기간 소상공인의 최대 매출증가액은 40%를 상회한다. 출처: 한경비즈니스 https://magazine.hankyung.com/business/article/202410300207b